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안견의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안견의 몽유도원도

세종의 첫째아들 문종, 둘째는 세조, 셋째는 안평대군이다.
첫째아들 문종은 30여년간 세자로 있으면서 아버지 세종을 잘 보필하였고, 학문에도 뛰어났다. 하지만 병약하여 왕위에 오른지 2년 4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둘째아들 세조는 수양대군에 봉해졌다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한명회, 권람 등과 함께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것이다. 이로인해 성삼문 등이 단종복위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셋째아들 안평대군은 학문과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왕자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 서예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 중국 사신들도 안평대군의 글씨를 얻어가려고 했다.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

어느 날 안평대군은 꿈을 꾼다. 정말로 꿈속에서 기막힌 세상을 본 것이다. 우뚝 솟은 봉우리와 골짜기, 기암괴석을 따라 마을로 내려 갔더니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마을이 나왔다. 이것이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무릉도원인 것이다.

안평대군은 자신의 꿈에서 본 풍경을 절친했던 안견에게 그려달라고 부탁을 한다. 안견은 비단 위에 안견이 봤다는 무릉도원을 3일만에 그려 주었다. 자욱한 안개가 깔린 풍경에 기암괴석과 폭포수가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왼쪽은 현실세계, 오른쪽은 이상 세계를 절묘하게 배치하여 신비감 있게 그려냈다. 현실 세계는 정면에서 바라봤고, 이상 세계는 위에서 내려다 보듯이 그렸다. 이를 부감법이라고 한다.

부감법: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방법으로 산수를 그리던 방식으로 한국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기법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가로 106.5cm, 세로 38.7㎝ 크기의 그림으로 조선 산수화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안견의 그림, 안평대군의 글과 시, 또 그와 함께 교유했던 선비들의 친필도 들어가 있다. 몽유도원도에 글씨를 남긴 사람은 김종서,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정인지 등이 있다.

안평대군의 삶

시, 서, 화에 모두 능했다고 알려진 안평대군은 조선 왕자 중 몇 안되는 예술가이다. 서예를 아주 잘해서 명필가로 이름 났다. 또 중국 회화를 여러 점 소장해서 그걸 정리한 책이 <화기>이다. 안견를 후원해서 벼슬이 정4품 호군이 되는데 뒤에서 조력한 것으로 보인다.


안평대군은 형 수양대군(세조)와 정치적 노선이 달리 했다. 수양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를 죽이고, 안평대군도 귀양보낸 후 사사시켰다.


몽유도원도에 글씨를 남겼던 정인지와 신숙주는 세조 편에 서서 세조 시대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함께 글씨를 남겼던 성상문, 박팽년, 이개 등은 1456년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발각되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을 우리는 사육신이라고 부른다.

일본으로 약탈당한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는 현재 일본 나라현 덴리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문화재가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을까? 아마 임진왜란 이후에 약탈당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정확한 물증이 없으니 훔쳐갔는지 약탈당했는지 알 수가 없다. 몇 차례 국내에 대여되어 전시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은 몽유도원도를 직접 보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한편 안견은 계유정난에도 살아남았다. 안견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안평대군에게 말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때 안평대군이 애지중지하던 먹이 사라졌는데 그게 안견의 품에서 발견되어 안평대군이 안견을 쫓아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되지 않아 계유정난이 발생했다고 하나 먹을 훔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정확하지 않다.
아마 안견이 세조 때에도 작품 활동을 해서 지어낸 말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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