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아들 안준생은 친일인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인가?

안중근 아들 안준생은 친일인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인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시다. 안준생은 1907년 황해도 해주에서 안중근과 김아려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이때 아버지 안중근은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 땅으로 떠났으므로 안준생은 아버지의 얼굴을 잘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안중근이 이토를 암살하자 안준생은 어머니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며 굉장히 비참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형 안문생은 길거리에서 누군가 준 과자를 먹고 죽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안준생은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도움으로 근근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운봉길의사가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장교들을 죽이는 의거가 있자, 일본은 상하이를 대대적으로 수색합니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상해를 떠났고, 일본은 안준생을 찾아냈다. 이후 일본의 감시 속에 생활하게 되었는데, 일본의 탄압으로 회사 취직도 어려워 구걸까지 하며 생활하였습니다.

미나미 지로 총독

박문사에서 이토 아들에게 사과

이때 미나미 지로 조선 제7대 총독이 안준생을 찾아옵니다. 서울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위령제가 있으니 이토 아들에게 사과하는 장면을 연출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안준생을 회유했습니다.
1939년 10월 16일 박문사에서 미나미 지로 총독의 제안대로 안준생은 이토 아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이토 아들과 안준생

이런 장면은 당시 일간지에도 대서특필되어 천하의 불효자식이라는 온갖 비난을 받았습니다. 친일 매국노라고도 하고, 아버지 안중근의 얼굴에 먹칠한 더러운 개라고도 하며 비난의 화살을 날렸습니다.

백범 김구는 해방이 되면 안준생을 처단해야 할 인물로 지정하며 중국 당국에 안준생에 대한 처벌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미나미 총독의 양자가 된 안준생은 편안한 삶을 사는 듯 했습니다. 곧 해방이 되어 1946년 어머니 김아려 여사가 돌아가시자 안준생은 간신히 귀국해서 몰래 숨어서 살아갔습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부산으로 피난왔다가 폐결핵에 걸려 사망했습니다. 안준생 아들은 안웅호로 미국 심장병에 권위있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안준생을 변절자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옹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안준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 되었지만 집안이 풍비박산 났고, 자신은 나라를 버려 가족들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과연 우리가 당시로 돌아가 안준생이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한번 생각해 봐야될 문제라고 안준생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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