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제암리 학살사건, 스코필드 박사

1919년 서울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의 주도로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3.1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이어 3월 4일에는 평안남도 강서, 3월 16일 경남 합천 등 전국 각지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난다. 경기도 화성에서도 송산, 향남, 장안 우정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장날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날에 만세운동을 벌인 것이다. 

평화적인 만세 운동에 일본은 총을 앞세워 주민들 46명을 죽이고, 4백 여명을 연행하여 고통스런 고문까지 가했다.

일제의 이런 만행에 주민들은 너무나도 분개하여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했다. 그리고 성난 군중들은 일본 순사까지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조선인 순사 조희창의 꼬임

이에 일본은 화성을 눈여겨 보게 된다. 그러다가 4월 15일 화성 제암리에 일본군들이 들이닥친다. 그리고는 주민들을 향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고 하며 교회로 주민들을 모이게 했다.

일본군은 미리 주민들의 명단을 입수하여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제암리 교회로 불러 모으고, 교회에 오지 않은 사람들은 찾아가서 데려오기도 했다. 사람들은 왜 모여야 하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였다. 그러자 친일파였고 제암리 출신였던 일본인 순사 조희창이 사람들을 안심시키며 교회당안으로 모일것을 이야기 했다. 교회당에서 모여 제암리 발전 방안을 생각해 보자고 꼬드긴 것이다.

23명 학살, 31개의 집 잿더미

주민들이 모이자 일본군은 갑자기 교회 문을 밖에서 잠그고 못질을 해 버렸다. 그리고 소총으로 교회를 향해 무차별적인 사격을 하였다. 그리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교회 전체를 불태워 버렸다. 이렇게 처참하게 학살을 당한 주민은 23명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사는 민가에도 불을 질러 순수하게 살아가던 제암리는 폐허가 되어 버린다. 31개의 집이 잿더미로 변했다고 한다.

 

전동례 할머니는 그 이튿날까지 30리 밖까지 시체 타는 냄새가 나고 재가 날렸다고 증언했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사건 발생 3일 후에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가 제암리에 도착한다. 스코필드는 제암리의 처참한 모습을 사진에 담아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알린다.

일제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만행

하지만 일본은 변명을 한다. 제암리에서 집단 반항 기세가 있어 사격을 하였고, 혼란 중에 옆 집에서 시작된 불이 교회에까지 옮겨 붙었다고 변명을 하였다. 즉 자신들은 잘못이 없고 원인을 조선인의 집단 반항으로 핑계를 댄 것이다. 일본은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하지만 전동례 할머니는 <교회 문을 잠그로 석유를 뿌려대며 불을 질렀다. 또 다른 집에도 불을 질렀다.>고 증언하였다. 전동례 할머니는 제암리 교회의 학살은 일본이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진행된 만행이라는 것이다.

63년만에 제암리 학살사건 유해 발굴

하지만 일본 재판부는 제암리 사건의 주범 아리타 중위를 약 50일 근신처분 내린 후 무죄 판결을 내렸다.

 

1982년 9월 84세였던 전동례 할머니는 피맺힌 증언을 한다. 저 곳에 교회가 있었고 그곳에서 일제의 만행이 있었다고 증언을 하였다.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에 따라 발굴 조사를 해보니 거기에서 의복의 단추, 병, 철사, 못, 동전 등이 발굴되고, 유해 20여구가 엉킨 채 발견되었다. 사건 발생 63년만에 제암리 학살사건이 확실하게 알려지게 된것이다. 여기에서 발굴된 유해들은 제암리 교회 뒷동산에 안장하였으며, 아픈 과거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제암리 사건을 널리 알린 사람은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이다. 그는 마지막 3.1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한국인들이여, 1919년 당시의 젊은이와 늙은이들에게 진 커다란 빚을 잊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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