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청 근위대가 스위스 용병인 이유, 루이16세 마이 앙투아네트

로마 교황청 근위대가 스위스 용병인 이유, 루이16세 마이 앙투아네트

 

스위스는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나라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스위스를 찾는다. 하지만 예전에는 산지가 전 국토의 70%, 호수는 5%로 되어 있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전 국토의 25%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산지와 호수의 영향으로 냉해가 심해서 농사가 잘 되지 않는 땅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스위스는 유럽에서도 가장 못사는 나라 중의 하나였다. 먹을 것을 찾아 살길을 찾아 스위스 젊은이들은 스위스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그들이 찾은 일자리 중 하나는 용병이었다.

용병이란 봉급을 주며 군인으로 쓰기 위해 고용된 병사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끝까지 항전했다. 

스위스 용병의 활약 상을 예를 들어 보겠다.

로마 교황청 근위대가 스위스 용병인 이유

로마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을 2번 다녀왔다. 거기에 있는 병사들은 스위스 용병이라고 가이드가 말해 주었다. 너무나 용맹스럽게 싸웠던 용병이었기에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스위스 용병을 쓰는 것이다.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는 스위스에 근위병 2백명 파병을 요구했다. 1506년 스위스 근위병이 교황청에 도착하였고, 교황 율리오 2세는 그들을 <교회 자유의 수호자>라고 불렀다. 
약 20년 후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로마 교황청을 침략했다. 로마 전역을 약탈했던 이른바 <사코 디 로마>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로마는 폐허로 변하고, 로마 교황청을 지키는 다른 용병들은 모두 도주했다. 그러나 끝까지 교황을 지킨 용병은 스위스 용병이었다. 

  당시 로마 교황은 클레멘스 7세였는데 스위스 용병들에게 스위스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베드로 대성당 주변에서 끝까지 항전하며 교황이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했다. 용병들은 거의 전멸하였는데 이에 감명을 받은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스위스 용병만을 교황청 근위대로 고용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지금도 로마 교황청의 근위대는 스위스 용병들이 지킨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킨 스위스 용병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 1792년에는 파리 튈르리 궁에 민중들이 몰려들어왔다. 여기에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머물고 있었다. 수많은 화난 민중들이 몰려오자 왕의 근위병들은 겁에 질려 도망을 쳤다. 그런데 오직 스위스 용병 부대만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필사적인 저항에 양측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프랑스 시민군은 퇴로를 열어줄테니 스위스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며 프랑스 시민군에 항전하며 프랑스 왕을 보호하려 했다. 스위스 용병들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스위스 용병들은 프랑스 시민군에 맞서 싸우다가 786명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스위스 용병들은 도망가지 않고 왜 필사적으로 싸웠을까?

왜 이들은 이길 수 없는 가망없는 싸움에 끝까지 저항했을까?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심이 너무 강해서일까? 아니다. 그들이 필사적으로 싸운 이유는 조국 스위스가 너무나도 가난했기 때문이다. 왕과 맺은 약속으로 왕을 끝까지 지킨다고 했는데, 왕을 버리고 도망간다면 자신들의 후손들은 용병이 되지 못하고 가난 속에서 굶주리게 될 것이기에 끝까지 약속을 지키며 싸운 것이다.

 

이렇게 용감하게 싸우는 스위스 용병들은 교황청이나 다른 나라에서도 1순위 영입대상 용병이었다. 우선 스위스는 고산지대가 많으니 폐활량이 좋고, 체력도 우수했다. 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 전투를 많이 해서 실전 경험도 풍부하였다. 그러니 스위스 용병들은 인기가 높았고 몸값도 비쌌다.

각 왕가에서 급한 일이 생기면 스위스 용병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곤 했던 것이다.

현재 교황청에 있는 스위스 용병들은 135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건장한 체격과 강인한 체력을 가진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다.

 

또 스위스 용병들은 1798년 나폴레옹 군대가 로마 교황청을 쳐들어 왔을 때에도 스위스 용병들은 당시 교황 피우스 6세를 위해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히틀러가 로마로 진격했을 때 바티칸 진입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국제적십자가가 창설된 배경과 이유

로황청 근위대를 제외하고 스위스 용병들은 1차 대전 이후 스위스 정부에서 금지하면서 용병 수출은 없다. 그 전까지는 스위스 용병이 너무 용맹하다보니 서로 고용해서 나중에는 스위스 용병끼리 전투하는 경우도 생겼다. 같은 나라 출신인데 서로 다른 고용주들을 위해 끝까지 싸운 것이다. 

이런 현실을 보고 안타까워 한 스위스 사업가가 앙리 뒤낭은 아군이고 적군이고 구별없이 모든 부상병을 돌보는 국제적십자사를 창설했다. 국제적십자사 깃발이 스위스 용병 부대의 깃발과 비슷한 것은 이런 이유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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