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만공주 선덕여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덕만공주 선덕여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에서 선물로 보내 온 꽃 그림을 보고 나비가 없으니 이 꽃을 심어도 향기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선덕여왕이 어떻게 우리나라 최초로 여왕이 될 수 있었을까? 당시 왕의 자손으로는 성골 계층의 남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성골은 부모가 모두 왕족인 경우이고, 진골은 부모 중 한 명이 왕족인 경우이다.

진흥왕의 아들들

신라 전성기를 이끈 24대 진흥왕의 아들은 동륜과 진지왕이다. 동륜은 일찍 죽고, 25대 진지왕은 상당히 문란한 생활을 하였다. 결국 진지왕은 쫓겨난다. 진지왕의 아들이었던 용춘은 왕이 되지 못하고,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이 26대 왕으로 등극한다. 동륜에게는 진평왕 외에도 아들 백반, 국반이 있었다. 진평왕의 딸이 27대 선덕여왕, 국반의 딸이 28대 진덕여왕이 된다. 진지왕 아들 용춘의 아들은 29대 무열왕이 된다. 

진평왕의 세 딸들

신라 26대 왕인 진평왕은 아들 없이 슬하에 딸만 3명 있었다. 덕만공주, 천명공주, 선화공주가 그들이다. 덕만공주는 선덕여왕이 되고, 천명공주는 후에 무열왕을 낳는다. 선화공주는 용모가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백제 서동이 신라로 넘어와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선화공주님이 서동과 만난다는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선화공주는 유배를 떠나다가 서동에게 구출되어 백제로 넘어가서 서동과 결혼한다. 후에 서동은 백제 무왕이 된다.

천명공주와 용춘

둘째였던 천명공주는 25대 진지왕의 아들이었던 용춘과 연인 사이였다. 용춘은 뛰어난 무술과 지혜로 화랑 내에서도 유명했다. 그는 풍월주가 되기 위해 무술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풍월주란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말로 명예와 출세가 보장된 자리였다. 용춘은 풍월주가 된 후 진지왕에게 혼인을 허락해 달라고 할 참이었다.

한편 첫째 덕만공주는 여자라도 왕위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백 회의에서 왜 여자가 왕위에 오를 수 없는지를 따졌고, 남편이 강력한 사람이라면 여자라도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번 풍월주에 오르는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했다.

난감하게 된 용춘은 풍월주 대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한다. 우승하면 천명공주를 버리고 덕만공주와 결혼해야 하기 때문이다. 덕만은 용춘에게 자신과 결혼하고, 천명을 후처으로 들이면 된다며 풍월주 대회에 나갈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해서 용춘은 풍월주 대회에서 우승한다.

용춘은 풍월주가 되었으나 진평왕에게 덕만과 결혼하지 않고, 천명과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자신의 사랑은 천명공주에게 바치고, 덕만공주의 신하로서 모든 충성을 다할 것이라고 맹세한다. 천명과 결혼을 허락을 받고, 철저하게 덕만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한 것이다.

50대에 등극한 선덕여왕

진평왕은 재위 53년만에 세상을 떠난다. 진평왕의 재위기간이 상당히 길었다. 덕만은 진평왕의 뒤를 이어 선덕여왕으로 등극한다. 이때 이미 나이가 50을 넘긴 때였다. 조카였던 김춘추가 재위했을 때 30살이나 되었다. 초기에는 여왕이 힘이 약해 약간의 반란이 있기도 했으나 선덕여왕은 굳건하게 왕권을 지켜 나갔다. 천명이 낳은 김춘추, 가야 유민 후손 김유신 등을 앞세워 후일 삼국통일의 기틀을 세워 나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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