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 테스형 기타 악보 나훈아가 처음 테스형을 불렀을 때 테스형이 누군가 했더니././ 테스형 악보인데 그렇게 완성도 높은 악보는 아니지만 대충 따라치니까 그런대로 테스형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DkSnd4DsEHc
1919년 서울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의 주도로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3.1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이어 3월 4일에는 평안남도 강서, 3월 16일 경남 합천 등 전국 각지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난다. 경기도 화성에서도 송산, 향남, 장안 우정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장날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날에 만세운동을 벌인 것이다. 평화적인 만세 운동에 일본은 총을 앞세워 주민들 46명을 죽이고, 4백 여명을 연행하여 고통스런 고문까지 가했다. 일제의 이런 만행에 주민들은 너무나도 분개하여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했다. 그리고 성난 군중들은 일본 순사까지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조선인 순사 조희창의 꼬임 이에 일본은 화성을 눈여겨 보게 된다. 그러다가 4월 15일 화성 제암리에 일본군들이 들이닥친다. ..
결재와 결제의 차이 나도 가끔 헷갈리는 한자어 중 결재와 결제가 있다. 문서를 승인할 때, 카드를 내고 물건을 살 때 어떤 것을 써야 할지 한자어를 바르게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다. 결재-決裁 결:決 - 결단할 결 재:裁 - 옷 마를 재(옷을 마른다는 것은 치수에 맞게 옷감을 자른다의 뜻) 裁 재 글자를 보면 옷의(衣)가 들어가 있다. 즉 옷을 얼마나 잘 재단했는지 판단한다는 의미로 결재를 사용하는데 문서를 보고 상급자가 승인하는 과정을 결재라 한다. 그러니까 판단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결재-하급자가 제출한 서류를 상급자가 보고 판단하여 승인한다. 예)결재 서류, 결재 났습니다. 결재 올리세요. 등 결제-決濟 결:決 - 결단할 결 제:濟 - 건널 제 濟 제 글자를 보면 ..
정조의 고모이자 사도세자 누이인 화완옹주에 대한 영조의 사랑 화완옹주는 영조와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화완옹주의 동복 오빠가 뒤주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이다. 화완옹주의 동복 언니도 5명 있었는데 첫째가 화평옹주, 다섯째가 화협옹주였고 둘째, 셋째, 넷째 언니들은 어렸을 때 사망했다. 11살 때 정치달과 결혼 화완옹주는 11살 때 이조판서 정우량의 아들 정치달과 결혼한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관계로 3년 더 궁에 머물다가 살림을 차렸다. 영조는 첫째 딸 화평옹주를 매우 아꼈는데 화완옹주가 10살일 때 화평옹주는 출산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화평옹주가 세상을 떠나자 화완옹주가 영조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영조의 자식을 편애하였는데 영빈이씨의 소생인 화평과 화완옹주는 매우 ..
해상왕 장보고 청해진 설치, 염장의 암살 해상왕 장보고의 어릴 때 이름은 삼국사기에서는 궁복, 삼국유사에서는 궁파라고 적혀 있다. 궁은 활과 관련된 것이니 이름에 궁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활을 잘 다루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름만 있고 성이 없는 것으로 봐서 미천한 신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보고에 대한 기록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828년 흥덕왕 때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청해대사 궁복은 성은 장씨인데 당나라 서주에 들어가 군중소장이 되었다가 후에 귀국하여 왕을 알현하고 졸병 1만을 이끌고 청해에 진을 세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기록인 번천 문집을 보면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 중국에는 고구려 유민 출신 이정기가 치주, 청주, 산둥반도에 이르는 지역을 중심으로 치..
수니파 시아파 탈중동정책 등 새로운 중동의 냉전구도 서기 632년 무함마드는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다. 그렇다면 후계자는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해 논쟁이 생겼다. 아랍 사회는 철저한 부계 중심 가부장적인 사회였는데 무함마드는 파티마라는 딸 자식이 1명 있었다. 무함마드는 유일한 직계 혈통인 사촌 남동생 알리와 파티마를 결혼시켰다. 알리는 그렇게 무함마드의 사위가 된다. 그래서 무함마드를 존경하고 추종했던 사람들이 유일한 무함마드의 혈통이자 사위인 알리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대 칼리프 알리 하지만 알리가 후계자가 되지 못한다. 당시 아랍 부족들의 전통은 전원 합의제였는데 여기에서 무함마드의 절친한 친구였던 아부 바크르, 우마르, 오스만이 차례대로 무함마드의 후계자가 된다. 무..
역관 홍순언과 석정의 부인의 인연, 종계변무 해결로 광국공신 역관 홍순언은 조선 사신 일행으로 명나라 사행길을 떠났다. 사행길에서 역관은 보수도 거의 없으니 사무역을 통해 이익을 챙기곤 했다. 하루는 임무도 마치고 호기를 부릴 겸 유곽에 가서 술을 먹게 된다. 그런데 어떤 기생이 자기 몸값을 터무니 없이 높게 부른 여인이 있었다. 홍순언이 의아하여 그녀를 부르니 소복을 입은 채로 홍순언 앞으로 왔다. 아니 왜 이런 옷을 입고 왔을까 하고 물어봤다. 어느 기생과의 만남 그러자 그 기생은 자신은 관리인 아버지와 유복하게 자랐는데 돌림병으로 부모님도 죽고 간신들에 의해 재산도 몰수 당해 부모 장례 치를 돈도 없어 기생집에 스스로 나왔다는 것이다. 또 자신을 사줄 사람이 돈 많은 사람이니 자신을 함부로 하지..
이황 이이 조식의 교육방법과 학문적 사상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교육방법 퇴계 이황은 주자의 철학을 계승해 인간과 만물의 근원을 이와 기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와 기는 확실하게 구분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이 이기이원론이다. 이는 중하고 기는 천하므로 이가 기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성리학적 도덕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경 사상을 강조하였다. 수기가 곧 치인이라고 하며, 수기를 중요시했다. 공부는 유학의 이론서를 먼저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황은 교육의 방법으로 입지, 거경궁리, 잠심자득, 숙독 등을 주장했다. 입지는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뜻을 세워야 하며 정신적으로 학문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학문을 하려는 동기가 명확해야 학문을 이룰 수 있다는 입장이다. 거경궁리의 거경은 ..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지켜 낸 김영환 장군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은 고려인들의 뛰어난 목판인쇄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팔만대장경을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신선의 필체라고 극찬했다. 현재에도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해인사에는 인민군들이 스며 들어 하마터면 팔만대장경이 없어질 뻔 했다. 당시 김영환 장군이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것이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가야산을 폭격하라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8월 당시 공군 대령인 김영환 장군에게 인민군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가야산을 폭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인민군 빨치산의 은둔지를 폭격하여 토벌하라는 명령이었다. 김영환 장군은 편대를 이끌고 가야산으로 날..
국군포로 장무환 일병 45년만에 귀환 1948년 장무환씨는 국방경비대로 국군에 입대한다. 이당시는 모병제라 배고픔과 경제적 어려움에 군대에 입대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무환도 이렇게 입대를 희망하여 국방경비대에 들어갔으나 폐에 문제가 생겨 8개월만에 의병 제대를 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장무환은 또 다시 입대한다. 이번에는 국군이 아니라 인민군에 입대한다. 장무환의 고향 경북 울진까지 인민군들이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장무환은 인민의용군에 편성된다. 전쟁 속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금강산까지 끌려간다. 그런데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서 도망을 가 고향 울진으로 돌아온다. 수백 km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도망온 것이다. 1952년 11월 또 장무환은 입대 영장이 나와 또 ..
1945년 우리나라는 드디어 해방을 맞이한다. 하지만 나라는 좌익, 우익으로 혼란스럽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이념 대립으로 서로 싸운다. 백성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 당장 끼니도 잇기 어려운 시기에 공산주의는 지주들의 땅을 공짜로 나눠준다고 꼬드긴다. 자기 땅을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소작농들은 땅을 공평하게 나눠준다고 하니 공산당에 가입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제주도에서도 공산주의자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선량한 국민들이었다. 그런데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공산당이 설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제주도는 공산당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지 않는다. 섬이라는 특수성이 작용된 듯 하다. 미군이 들어온 후 일단 내륙의 상황을 정리하는데 바빴으므로 제주도에는 늦게 들어가게 된다. 194..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알려지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처음으로 알린 사람은 중앙일보의 신성호 기자였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1명이 쇼크사했다는 사회면의 짧은 기사를 썼다.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 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중이라고 적었다.그러니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구타나 고문 등을 연상될 수 있는 기사였다. 박군은 서울대 운동권 학생이며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이라고도 적었다. 이러니 시국사범임을 생각할 수 있는 기사였다. 이 짧은 기사가 나가자 기자들과 사람들은 경찰들의 해명을 요구하였다. 이에 경찰은 치니 하고 죽었다고 발표를 했다. 윤상삼 기자는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처음 확인했던 의사의 목격담을 기사를 보도했다. 경찰들은 고문으로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박종철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