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 서인 남인 등 조선의 붕당정치

동인 서인 남인 등 조선의 붕당정치

 

조선 중기 때부터 정치 운영 형태는 붕당정치이다. 붕당정치는 학연을 바탕으로 형성된 여론인 공론으로 국정을 이끌어 나간다. 즉 학문적 생각이나 정치적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을 붕당이라고 한다.

조선 13대 왕 명종은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어린 나이에 죽어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3남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그는 바로 1552년 즉위한 14대왕 선조이다.

선조가 즉위했을 당시는 그 동안 권력을 휘둘렀던 훈구 세력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선조는 사림파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림들은 앞선 왕대에 외척들의 척신정치의 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보였다. 그리고 이조전랑이라는 벼슬을 놓고 다투는 과정에서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된다. 이조전랑 직을 놓고 다툰 사람은 바로 김효원과 심의겸이다.

김효원이 이조전랑직으로 추천되었다. 그러나 심의겸은 김효원이 한때 척신인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심의겸의 반대가 있었으나 김효원은 조정기의 추천으로 결국 이조전랑이 된다. 

그다음 이조전랑으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추천되었다. 이번에는 김효원이 반대한다.

 

이조전랑

이조전랑은 정5품인 정랑과 정6품은 좌랑을 합쳐 부른 벼슬이름이다. 품계는 낮지만 삼사의 관리를 임명하는 인사권과 후임 추천권이 있어 그 권한이 막강한 편이었다. 

 

 

동인과 서인

이 둘의 대립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는 이유가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한양의 동쪽에 있었다고 해서 김효원을 지지하던 사람들을 동인, 심의겸 집이 한양의 서쪽에 있었다고 해서 심의겸을 지지하던 사람들을 서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동인은 주로 이황과 조식의 학풍을 이어받은 경상도 선비들, 서인은 주로 이이와 성혼의 학풍을 이어받은 경기와 충청도 선비들이 많았다.

이후 정여립 모반사건을 계기로 서인이 실권을 잡는다. 서인 정철은 정여립과 가까운 사람들이 동인이었다는 이유로 이들을 처형하면서 동인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때 숙청된 사람들이 거의 천 여명이나 되었는데 이를 기축옥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서인 정철은 선조에게 세자를 광해군으로 책봉해야 한다고 건의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서인들은 대거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선조는 적자인 영창대군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이가 어려서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하니 정철은 동인들의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후 서인들에 대한 처벌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동인들은 분열되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의병 활동 등 왜적을 물리치는데 공헌한 북인들이 권력을 잡으며 광해군을 왕으로 추대하는데 공헌을 한다. 그래서 광해군 시대에는 북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하지만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하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이유와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와의 신의를 버렸다는 이유로 서인들의 공격을 받아 왕위에서 쫓겨난다.

인조 대에는 서인들과 남인 일부가 연합하는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북벌을 추진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죽는다. 

효종이 죽은 뒤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이 3년인지 1년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이것이 1차 예송논쟁이다.

효종비도 죽었다. 이때 자의대비가 상복을 1년을 입어야 하는지 9달을 입어야 하는지 또 논쟁을 벌인다. 이것이 2차 예송논쟁이다.

별것도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송은 성리학적 이념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2차례 예송논쟁을 거치며 서인과 남인은 극심한 대립이 있었다.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붕당을 3차례 교체하는 환국정치를 하였다. 그러나 숙종의 환국정치도 붕당 간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왕권도 불안해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영조 대에는 붕당 간 세력을 균형있게 하려는 탕평론이 대두되었고, 실행에 옮겨 사회를 안정시키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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