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 후 아관파천한 고종

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 후 아관파천한 고종

한 나라의 국모를 무참하게 살해한 일본 칼잡이들은 누구일까? 일본이 말하는대로 일반 깡패 낭인 집단이 우발적으로 명성황후를 살해했을까? 그건 절대 아니다. 그럼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일본 엘리트 집단이며 우익세력으로 구성된 사람들이다. 조선이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려고 하자 이에 압박을 느낀 일본이 철저하게 계획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범죄인들에 대한 처벌은?

그럼 한 나라의 국모를 살해한 범죄인들에 대한 처벌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을 죽였으니 당연히 합당한 처벌이 있어야 했다. 세계 사람들도 조선에서 국모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외국의 시선이 두려웠는지 몰라도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미우라 공사 등 관련자들을 재판정에 세웠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과 조선에서 진범이 이미 검거해서 처벌했다는 이유로 무죄 방면한다.

명성황후 폐서인 주장

또 일본은 명성황후를 폐서인해야 한다고 고종을 압박한다. 명성황후가 군대를 해산한다고 유언비어를 만들어 민심을 동요시키고 조정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여 나라의 혼란을 일으켰으니 폐서인 시키라고 압박한다.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후 책임을 면하려고 명성황후가 도망갔다고 거짓 발표를 하였다. 즉 궁궐에서 큰일이 발생했는데 국모가 자리를 비우고 도망갔으니 황후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미 명성황후를 살해해 놓고 말이다. 폐서인이 되면 일반 여인을 죽인 것이지 황후를 죽인 것이 아니므로 자신들의 책임을 어떻게 해서든지 회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종은 끝까지 버텼지만 일본에 의해 고종실록에는 명성황후를 못된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고종이 나중에 번복하였지만 일본에 의해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떨칠 수가 없었다. 

 

고종이 아관파천 한 방법

일본은 고종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으며, 고종은 언제 자신을 독살할지 모르는 두려움속에서 살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은 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일본의 감시 속에서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궁녀들이 타고 다니는 가마였다. 궁에는 궁녀들의 가마가 계속 드나들었으므로 일국의 국왕이 체통없이 가마에 숨어 가리라는 생각을 일본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임금이 들어간 일을 아관파천이라고 부른다. 당시 러시아를 아라사라고 불렀으므로 아라사 공사관을 아관, 임금이 갔으니 파천, 그래서 아관파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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