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동맹단 강우규 의사 사이토에게 폭탄 투척

노인동맹단 강우규 의사 사이토에게 폭탄 투척

 

단두대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강우규 의사

백발의 우국지사 강우규

  백발의 우국지사인 강우규가 남긴 시이다. 강우규는 평안남도 덕천 출신으로 친형에게 배운 한학과 한방 의술을 바탕으로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교육사업에 뜻을 두었으며 이동휘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문하였고, 이를 통해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동휘 선생

  홍원에 영명학교를 세우고 교회도 세웠다. 하지만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되자 북간도로 이주하여 의술을 베풀고 조선의 독립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1915년에 중국 지린성 요하현에서 농토를 개간하여 신흥촌을 건설했다. 1917년에는 동광학교를 세워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노인동맹단 활동

  1919년에는 45살 이상 70세 이상만 가입할 수 있는 노인동맹단 요하현 지부의 책임자가 되었다. 노인동맹단은 비록 자신들은 늙고 병약하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특히 젊은 독립투사들을 지원하는 일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강우규는 안중근과 같은 방법인 직접적인 무장투쟁을 추구하였다. 3.1운동 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며 일본 총독도 하세가와에서 사이토로 교체된다.

 

말만 문화통치였지 우리나라 조선을 영구히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의 간책임을 안 강우규는 새로운 총독을 암살하기로 작정한다. 또  1919년 이발과 정치윤 등 5명의 노인동맹단 단원들이 서울에서 시위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구금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더욱 분개한 강우규는 수류탄 1발을 구해서 국내로 잠입한다.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 투척

  그해 9월 2일 17시에 신임 총독인 사이토가 탄 열차가 남대문정거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마차에 올라 출발하려던 사이토 총독을 향해 강우규는 수류탄 1발을 투척한다. 폭발음과 함께 총독부 관리들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힌다. 하지만 사이토 총독을 폭살하는데는 실패한다. 폭탄 투척 후 유유히 현장을 빠져 나온 강 의사는 재거사를 계획하였다.

일본 경찰은 눈에 불을켜고 강 의사를 잡으려고 애썼으나 실패했다. 강우규는 서울 시내에 은거하고 있었으나, 독립지사들을 탄압하던 고등계 형사 김태석에게 사건발생 35일만에 잡힌다.

일본은 폭탄을 투척한 사람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라는 점에 경악했다. 당시 조선인 남자 평균 수명이 51세이니 65세의 강우규는 완전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역 앞 강우규 의사의 동상

강우규의 의거로 의열투쟁 가속화

  강우규는 폭탄 투척으로 총독 암살 미수 등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재판내내 변호사 없이 당당한 모습을 보여 일본 사람들도 감동하였다고 한다. 강우규 폭탄 의거는 1920년대에는 일제에 대한 의열 투쟁이 가속화 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김원봉의 의열단 활동으로 이어지는 강우규의 의거는 강렬한 독립 정신을 세계에 알린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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