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의 장수 비밀은 소식과 거친 음식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약 46세라고 알려져 있다. 구중궁궐에서 조선 팔도 최고의 음식을 먹고, 영양식을 챙겨 먹었을텐데 평균 수명이 46세였다니 지금으로 말하면 단명한 셈이다. 아마 왕 노릇을 하며 경연이다 상소문이다 역모다 하며 이런 것들에 대한 스트레스가 상당히 많아 단명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물론 의술이 뛰어나지 않았던 것이 더 큰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런 평균 수명을 2배 가까이 살았던 왕이 있었으니 바로 영조 임금이다. 그 시절에 83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당시 80세를 넘겼다는 것은 지금으로 보면 100세를 훌쩍 넘긴 것이나 다름없다. 도대체 영조 임금에게는 어떤 장수 비밀이 있었을까? 영조의 장수 비밀 영조는 우선 ..
잃어버린 20년, 일본 경제가 더욱 추락하게 된 원인 4가지 1989년 미쓰비시 부동산이 미국 록펠러센터를 매입하고, 소니가 할리우드의 컬럼비아 영화사를 사들였다. 엄청난 성장을 하며 질주하던 일본 경제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IMF사태처럼 1993년 일본도 버블이 터져 버린다. 엄청나게 오른 부동산과 주식가격으로 거품이 붕괴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80년대의 고도 성장이 겉은 화려했지만 속은 부실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거품이 꺼지니 1993년부터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에 진입하게 된다. 1990년 국가경쟁력 1위였던 일본이 2019년에는 30위까지 추락하고 만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 동안 또 일본 경제를 강력하게 충격을 먹였던 4가지가 발생한다. 그럼 잃어버린 20년, 일본 경제를 더욱 추락하게..
교사 유튜브 겸직허가 받아야 교육부에서 교육과 관련된 유튜브 활동을 장려하고, 사생활 영역에서의 유튜브 활동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니 교사들도 유튜브 활동을 하며 교육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유튜브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니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저작권과 초상권 문제이다. 유튜브 저작권문제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으려면 무료 소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폰트는 눈누 사이트에서 상업용 무료 폰트를 다운받아 사용한다. 많은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자체 개발한 폰트를 무료로 배포하기도 하는데 눈누는 이런 한글폰트를 모아 소개하는데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 검색이나 무료로 이미지를 제공하는 사이트를 이용한다. 구글 이미지에는 상당히 많은 이미지..
이황 이이 조식의 교육방법과 학문적 사상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교육방법 퇴계 이황은 주자의 철학을 계승해 인간과 만물의 근원을 이와 기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와 기는 확실하게 구분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이 이기이원론이다. 이는 중하고 기는 천하므로 이가 기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성리학적 도덕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경 사상을 강조하였다. 수기가 곧 치인이라고 하며, 수기를 중요시했다. 공부는 유학의 이론서를 먼저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황은 교육의 방법으로 입지, 거경궁리, 잠심자득, 숙독 등을 주장했다. 입지는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뜻을 세워야 하며 정신적으로 학문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학문을 하려는 동기가 명확해야 학문을 이룰 수 있다는 입장이다. 거경궁리의 거경은 ..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지켜 낸 김영환 장군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은 고려인들의 뛰어난 목판인쇄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팔만대장경을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신선의 필체라고 극찬했다. 현재에도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해인사에는 인민군들이 스며 들어 하마터면 팔만대장경이 없어질 뻔 했다. 당시 김영환 장군이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것이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가야산을 폭격하라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8월 당시 공군 대령인 김영환 장군에게 인민군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가야산을 폭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인민군 빨치산의 은둔지를 폭격하여 토벌하라는 명령이었다. 김영환 장군은 편대를 이끌고 가야산으로 날..
국군포로 장무환 일병 45년만에 귀환 1948년 장무환씨는 국방경비대로 국군에 입대한다. 이당시는 모병제라 배고픔과 경제적 어려움에 군대에 입대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무환도 이렇게 입대를 희망하여 국방경비대에 들어갔으나 폐에 문제가 생겨 8개월만에 의병 제대를 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장무환은 또 다시 입대한다. 이번에는 국군이 아니라 인민군에 입대한다. 장무환의 고향 경북 울진까지 인민군들이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장무환은 인민의용군에 편성된다. 전쟁 속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금강산까지 끌려간다. 그런데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서 도망을 가 고향 울진으로 돌아온다. 수백 km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도망온 것이다. 1952년 11월 또 장무환은 입대 영장이 나와 또 ..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알려지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처음으로 알린 사람은 중앙일보의 신성호 기자였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1명이 쇼크사했다는 사회면의 짧은 기사를 썼다.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 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중이라고 적었다.그러니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구타나 고문 등을 연상될 수 있는 기사였다. 박군은 서울대 운동권 학생이며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이라고도 적었다. 이러니 시국사범임을 생각할 수 있는 기사였다. 이 짧은 기사가 나가자 기자들과 사람들은 경찰들의 해명을 요구하였다. 이에 경찰은 치니 하고 죽었다고 발표를 했다. 윤상삼 기자는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처음 확인했던 의사의 목격담을 기사를 보도했다. 경찰들은 고문으로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박종철 군..
시라소니 이성순의 삶 시라소니 이성순은 1916년 2월 29일에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나 67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아버지가 목사인 이기정과 셋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시라소니 이성순은 어릴 때부터 골목대장이었다고 한다. 운동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을 정도로 좋아하였다. 보증 문제로 집안 사정이 좋지 않게 되어 16살에는 달리는 열차에 오르내리며 밀무역을 시작하였다. 이런 밀무역을 도비노리라고 한다. 열차에 잘못 올라타다가는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민첩한 시라소니는 이 일을 하면서 몸을 단련하였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싸움도 잘할 수 밖에 없었다. 신의주와 인근 지역에서 싸움을 하다가 이북 제일의 싸움꾼이라고 소문난 박두성에게 싸움을 신청했다. 이북 최고의 주먹이자 박치기 왕으로 소문난..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 조선시대의 무덤은 신분에 따라 이름을 다르게 붙였다. 왕, 왕비,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왕의 무덤은 능이라고 불렀다. 후궁의 무덤으로 왕세자의 친모의 무덤, 보위에 오르지 못한 왕세자의 세자빈의 무덤 등은 원이라고 불렀다. 그외 일반 사대부들의 무덤은 죽은 사람의 이름 뒤에 묘라고 불렀다. 그런데 능, 원, 묘의 세 가지 이름을 모두 가진 무덤이 있었다. 바로 융릉이다. 임오화변 발생 영조는 조선 21대 왕이다. 영조 재위 38년 신하들의 당파 싸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 아들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는 임오화변(1762년)이 일어난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된 정조 영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은 수은묘라고 부르고 장례를 신속하게 마쳤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목격한 정조는 ..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사피엔스 등으로 진화하면서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이집트, 이란, 이라크를 거쳐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 나간다. 그렇게 먹을 것을 찾으러 정처없는 여행을 하다가 약 70만년전 한반도에 들어온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1983년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는 약 4만년전으로 추정되는 구석기 시대 어린아이 화석이 발견된다. 석회석 광산을 찾기 위해 헤매던 김흥수 씨는 동굴 속을 살펴보다가 사람 뼈를 발견한 것이다. 발견 당시 석회암 바위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고운 흙이 뿌려져 있었고, 그 흙 속에서 국화꽃 가루가 발견되었다. 오늘 날에도 장례식장에 가면 국화꽃으로 돌아가신 사람을 추모한다. 그 옛날 구석기인들도 국화꽃을 사용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죽은..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 유신시대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유린당했다고들 한다. 1974년 7월 천주교 지학순 주교는 양심선언을 한다. 유신헌법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다르게 폭력과 공갈에 의한 국민투표이므로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된다고 말했다. 지학순 주교는 이 양심선언으로 구속이 되고, 15년 형을 받는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이를 반대하며 일어선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천주교의 젊은 신부들이었다. 1974년 9월 23일 지학순 주교의 석방, 유신 철폐,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300여명의 젊은 신부들은 을 결성한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1000명 정도의 신부님들이 있었는데, 그중 300명이 모였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다는 것인지 알 수 있다. 함세웅 신부는 당시 명망있..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간 사람들 1950년 한국 전쟁 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최빈국 중 하나였다. 미국에서 무상 원조로 간신히 연명하며 살아가던 시대였다. 그런데 미국이 무상원조에서 유상원조로 정책을 바꾼다. 유상 원조를 받으려면 돈을 갚을 수 있도록 경제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1963년은 우리나라 외환보유고가 1억달러 미만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차관을 들여와야했다. 우리나라도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미국은 돈을 갚을 수 없는 계획이라고 판단해서 차관 요청을 거부했다. 이때 서독을 새로운 외화 획득의 대안으로 봤다. 당시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울 만큼 경제가 활성화 되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서독의 막장에서 일할 서독행 광부 모집을 하였다. 20~35살의 젊은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