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우리나라는 드디어 해방을 맞이한다. 하지만 나라는 좌익, 우익으로 혼란스럽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이념 대립으로 서로 싸운다. 백성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 당장 끼니도 잇기 어려운 시기에 공산주의는 지주들의 땅을 공짜로 나눠준다고 꼬드긴다. 자기 땅을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소작농들은 땅을 공평하게 나눠준다고 하니 공산당에 가입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제주도에서도 공산주의자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선량한 국민들이었다. 그런데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공산당이 설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제주도는 공산당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지 않는다. 섬이라는 특수성이 작용된 듯 하다. 미군이 들어온 후 일단 내륙의 상황을 정리하는데 바빴으므로 제주도에는 늦게 들어가게 된다. 194..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알려지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처음으로 알린 사람은 중앙일보의 신성호 기자였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1명이 쇼크사했다는 사회면의 짧은 기사를 썼다.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 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중이라고 적었다.그러니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구타나 고문 등을 연상될 수 있는 기사였다. 박군은 서울대 운동권 학생이며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이라고도 적었다. 이러니 시국사범임을 생각할 수 있는 기사였다. 이 짧은 기사가 나가자 기자들과 사람들은 경찰들의 해명을 요구하였다. 이에 경찰은 치니 하고 죽었다고 발표를 했다. 윤상삼 기자는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처음 확인했던 의사의 목격담을 기사를 보도했다. 경찰들은 고문으로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박종철 군..
시라소니 이성순의 삶 시라소니 이성순은 1916년 2월 29일에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나 67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아버지가 목사인 이기정과 셋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시라소니 이성순은 어릴 때부터 골목대장이었다고 한다. 운동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을 정도로 좋아하였다. 보증 문제로 집안 사정이 좋지 않게 되어 16살에는 달리는 열차에 오르내리며 밀무역을 시작하였다. 이런 밀무역을 도비노리라고 한다. 열차에 잘못 올라타다가는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민첩한 시라소니는 이 일을 하면서 몸을 단련하였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싸움도 잘할 수 밖에 없었다. 신의주와 인근 지역에서 싸움을 하다가 이북 제일의 싸움꾼이라고 소문난 박두성에게 싸움을 신청했다. 이북 최고의 주먹이자 박치기 왕으로 소문난..
조광조의 개혁 도학정치 1506년 박원종, 성희안 등은 12년간 폭압적인 정치로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든 연산군을 쫓아낸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많은 선비들을 죽게 만들었고, 백성들의 삶은 돌보지 않고 자신의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다. 박원종, 성희안은 유순정, 신윤무 등과 더불어 거사를 성공하여 진성대군을 옹립하니 이것이 중종반정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연산군의 폭정에 들고 일어난 반정으로 갑자기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중종은 즉위 초 반정 공신들에 의해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으나, 연산군 시대의 잘못된 점을 고쳐 나갔다. 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선비들의 한을 풀어주고 성균관을 학문을 공부하는 곳으로 다시 만들었다. 반정 핵심인물인 박원종과 성희안이 차례로 죽자 서서히 왕권을 안정시켜..
황윤길과 김성일, 서로 다른 주장 1590년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이 사절단으로 일본의 정세를 알아보려 파견되었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범할 것이라는 소문에서 일본 정세를 파악하러 간 것이다. 두 사람은 일본을 갔다 와서 서로 상반된 주장을 내세운다. 선조는 일본이 정말 우리나라를 침입해 올 것 같냐고 물어 봤다. 황윤길은 토요토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으니 반드시 조선을 침입해 올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김성일은 토요토미는 별로 위협적인 인물이 아니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조선은 두 사람의 의견에 조선 조정도 두 편으로 나뉘어 언쟁을 벌인다. 결국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입해 오지 않는다는 김성일의 의견을 수용한다. 조선 조정은 앞으로 다가올 임진왜란에 ..
우장춘 박사 그리고 씨없는 수박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을 견제하려고 친러 정책을 폈던 명성황후가 1895년 을미사변으로 시해된다. 일본은 여우사냥으로 명명된 조선 왕비 시해 작전을 위해 음모를 꾸민다. 시해는 일본 낭인들이 맡고, 외관 상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는 것이다. 을미사변과 우범선 조선 왕비 시해를 주도했던 일본인은 주한일본공사 미우라였다. 일부 친일 조선 사람들을 끌여 들여서 조선인 훈련대 반란으로 꾸미려고 했다. 대표적 인물이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이었다. 우범선은 조선에 불만을 품고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그는 항상 조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조선왕비 시해 작전을 하기 전 우범선은 여러가지 결정적인 정보를 일본인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시해 당일 ..
봉림대군 효종의 북벌론 그리고 갑작스런 죽음 1649년 인조가 죽자 봉림대군은 왕위에 올라 17대 왕 효종이 된다. 아버지 인조 때 청나라의 침입으로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전하였으나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고 만다. 머리를 청나라 황제에게 조아리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많은 고생을 한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청나라에 끌려온 뒤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청나라에 끌려온 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구출하려고 노력했다. 또 청나라에 있으면서 서양의 훌륭한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조선을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다짐을 했다.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 청나라에서 오랜 볼모생활을 마치고 ..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 조선시대의 무덤은 신분에 따라 이름을 다르게 붙였다. 왕, 왕비,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왕의 무덤은 능이라고 불렀다. 후궁의 무덤으로 왕세자의 친모의 무덤, 보위에 오르지 못한 왕세자의 세자빈의 무덤 등은 원이라고 불렀다. 그외 일반 사대부들의 무덤은 죽은 사람의 이름 뒤에 묘라고 불렀다. 그런데 능, 원, 묘의 세 가지 이름을 모두 가진 무덤이 있었다. 바로 융릉이다. 임오화변 발생 영조는 조선 21대 왕이다. 영조 재위 38년 신하들의 당파 싸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 아들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는 임오화변(1762년)이 일어난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된 정조 영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은 수은묘라고 부르고 장례를 신속하게 마쳤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목격한 정조는 ..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사피엔스 등으로 진화하면서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이집트, 이란, 이라크를 거쳐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 나간다. 그렇게 먹을 것을 찾으러 정처없는 여행을 하다가 약 70만년전 한반도에 들어온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1983년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는 약 4만년전으로 추정되는 구석기 시대 어린아이 화석이 발견된다. 석회석 광산을 찾기 위해 헤매던 김흥수 씨는 동굴 속을 살펴보다가 사람 뼈를 발견한 것이다. 발견 당시 석회암 바위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고운 흙이 뿌려져 있었고, 그 흙 속에서 국화꽃 가루가 발견되었다. 오늘 날에도 장례식장에 가면 국화꽃으로 돌아가신 사람을 추모한다. 그 옛날 구석기인들도 국화꽃을 사용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죽은..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 유신시대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유린당했다고들 한다. 1974년 7월 천주교 지학순 주교는 양심선언을 한다. 유신헌법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다르게 폭력과 공갈에 의한 국민투표이므로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된다고 말했다. 지학순 주교는 이 양심선언으로 구속이 되고, 15년 형을 받는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이를 반대하며 일어선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천주교의 젊은 신부들이었다. 1974년 9월 23일 지학순 주교의 석방, 유신 철폐,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300여명의 젊은 신부들은 을 결성한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1000명 정도의 신부님들이 있었는데, 그중 300명이 모였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다는 것인지 알 수 있다. 함세웅 신부는 당시 명망있..
공자와 안회의 일화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 공자는 자신의 도덕정치를 펼칠 왕을 찾아 나섰다. 공자 일행은 쉬지 않고 여행을 계속하였다. 많은 어려움이 이겨내며 오랜 기간 여행을 했던 공자 일행은 어느 산 속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쉬면서 공자의 제자 안회가 쌀 주머니를 열어보니 쌀이 얼마 남지 않았다. 걸어오면서 쌀알을 떨어뜨리며 온 것이었다. 식량이 다 떨어져 먹을 것이 없던 공자와 제자들은 산에 올라가 나물을 뜯고 먹을 것을 찾았다. 배가 고프니 나물이라도 먹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주린 배를 나물로 채웠다. 그 다음 날도 나물을 먹고, 그 다음날도 나물을 먹었다. 나물만 먹으니 허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산 속을 벗어나면 먹을 것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앞으로 나아갔다. 제자들은 너무나 ..
조선 19대 왕 숙종은 장희빈 사이에서 경종이 태어난다. 또 숙종과 무수리 숙빈 최씨 사이에서 연잉군 후에 영조가 태어난다. 숙종의 뒤를 이어 경종이 왕위를 잇는다. 하지만 경종은 몸이 건강하지 못하고, 후사도 없었다. 경종 집권파인 소론은 늘 이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야당 격인 노론은 경종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연잉군을 차기 왕으로 점찍고 연잉군에 붙어 선다. 그리고 경종에게 후사가 없으니 세제를 책봉하고, 경종이 몸이 편찮으니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라고 간언을 한다. 경종의 사망 경종은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킨다. 소론에 의해 자신을 지지하던 노론 세력들이 다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했으니 연잉군도 매우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하루는 아픈 경종에게 쾌차하라는 의미로 감과 간장게장을 ..